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리 여왕(스코틀랜드) (문단 편집) === 현대 ===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메리를 종교 분쟁과 왕위 갈등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도 생겨났다. 현대에는 '비운의 미녀 군주'로 재조명되면서 각종 영화, 티비 쇼 등에서 다루어졌는데 이런 시각은 역사학계에서는 큰 지지를 얻지 못하지만 대중적으로는 널리 퍼진 시각이다.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가 평전을 쓰면서 메리를 호의적으로 비평한 것이 유명한데, 츠바이크는 소설가이지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실증적인 관점에서 보면 츠바이크는 개인으로서 메리의 비극적인 인생만 부각했지, 군주로서의 입장을 고려한 역사학적 판단을 한 것이 아니므로, 이에 기반하여 메리에 대한 재평가를 비판하는 의견도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많다. 스코틀랜드 역사학계 입장에서 보면 역사왜곡이 대중 문화를 통한 어설픈 우상화로 인해 훨씬 더 많이 퍼진 급이다. 역사학자들은 "외국인이었던 데다 군주로서 갖춰야 할 분별력도 없어서 왕위에서 쫒겨난 사람을 관광용으로 미화하고 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는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고유의 [[개신교]] 교파인 [[장로회]]의 큰 기틀이 마련되고, [[중세]] 후기부터 지속된 귀족, 도시민, 성직자의 삼각 과두정 체제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박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로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메리 스튜어트의 극적인한 개인사와 여성성만 자꾸 부각시켜서, 정작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이 묻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이 널리 퍼진 이유는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시시콜콜한 신학적, 정치적, 이념적 문제보다 미녀 여왕의 사랑 이야기와 비극적인 삶이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또한 녹스, 뷰캐넌, 멜빌 같은 동시대 스코틀랜드 역사를 주름잡은 [[종교개혁]]의 거두들이 하나같이 다혈질에 꽉 막힌 꼰대들인데다 심지어 뷰캐넌 같은 경우 [[알코올 의존증]]에 폭력쟁이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역사적 중요성과 별도로 인간적인 매력이 별로 없다.[* 특히 뷰캐넌은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이었다.] 당대 최고의 라틴어 문장가이자 존 녹스를 이어 장로교회의 신학적 토대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된 종교개혁 이후 근세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민족주의 이념마저 창시한 것으로 평가되는 16세기 스코틀랜드 최고의 학자 조지 뷰캐넌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좀 비싼 감옥의 죄수나 마찬가지였던 어린 [[제임스 6세]]의 개인 교사를 했다. 하지만 뷰캐넌은 어린 왕이 잘못하면 때리기까지 했는데 이 밑에서 배운 제임스 6세, 훗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본인의 노년까지 술취한 조지 뷰캐넌이 라틴어 문장을 똑바로 못 외웠다고 흠씬 두드려 패는 악몽을 꾼다고 호소했다. 왕실 자문회 기록에 따르자면 이때 보다 못한 제임스 6세의 시녀 한 사람이 아무리 어리다 하더라도 군왕을 이렇게 두들겨 패선 안된다고 항의하자 술냄새 풀풀 풍기던 뷰캐넌이 침 뱉듯 던진 말이 "시녀장은 시녀장 일이나 열심히 하시오, 난 내 책무를 다 할 뿐이니."[* 이 때문에 제임스 1세는 뷰캐넌을 매우 싫어하였고 뷰캐넌은 이 일로 직위해제되어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제임스 1세는 뷰캐넌의 능력은 높이사 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뷰캐넌은 장관이 되었을때도 제임스 1세와의 관계가 좋지못해 얼마못가 해임된다. 그래도 제임스 1세가 다른 관직을 주는 배려는 해주었다.][* 제임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뷰캐넌에게 배운 것이 엄청나게 많다고 인정은 하였다. 성년이 될수록 왕권을 명백하게 종교적 권위 아래에 두는 장로회의 과격성을 배격하고 [[영국 국교회]] 고교회파의 국왕 중심적 신학적 온건성을 추구하였던 건,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장로회 지도부에 대한 염증도 상당히 컸으리라 추측된다.] 그리고 젠더 담론이 역사적 평가와 기억에도 큰 평가를 끼치게 된 오늘날에서 보면 스코틀랜드 장로교 개혁자가 지지한 존 녹스의 여군주 폭군론(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은 현대의 성평등적 가치관과 노골적으로 충돌하는 탓에 대중적 인기가 떨어진다. 여군주 폭군론의 원제를 직역하자면 '여자들의 극악무도한 [[정권]]에 맞선 첫 번째 나팔 소리'라는 제목이다. 당시 제네바에서 망명/유학 중이던 존 녹스가 [[1558년]]에 쓴 저서인데 이 책에서 존 녹스는 성경에 따르면,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 자체가 천륜을 뒤집는 행위이니 여왕을 갈아 엎고 [[살리카법|남자만 왕이 될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이 출간된 1558년 당시에는 아주 공교롭게도 왕호까지 똑같은 [[잉글랜드 왕국]]의 [[메리 1세]]와 [[스코틀랜드 왕국]]의 메리 여왕이라는[* 심지어 가톨릭에서 메리라는 이름은 개신교도들이 혐오해마지않는 성모 신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독실한 가톨릭 교도 여왕 2명이 각각 이웃 나라에서 사이좋게(?) 재위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 명의 메리 여왕들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과 동시에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몰아 한창 신나게 조지고 있다보니, 당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개신교 종교개혁가였던 존 녹스가 보기에는 "이 두 메리라는 이단 가톨릭 광신도 미친 여왕년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을 봐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역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책이 출간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에서 가톨릭교도 여왕 [[메리 1세]]가 사망하고, 같은 개신교도에 명군인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잉글랜드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존 녹스는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존 녹스는 자신의 책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같은 나쁜 가톨릭 여왕들만 상대로 한 것이지, 엘리자베스 같은 참된 개신교 여왕을 향한 게 아니라고 땀 좀 한 바가지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을 했다(...). 당연히 엘리자베스 1세는 '여군주'로써 개신교 이전에 왕권을 능멸한 존 녹스의 여군주 폭군론에 대해 노발대발했고, 존 녹스를 잉글랜드에서 영구추방하고 그의 저서인 여군주 폭군론을 금서로 지정했다. 이걸로도 모자라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내의 존 녹스를 추종하던 청교도들과 그의 제자들을 숙청하고, 심지어는 당시 [[장 칼뱅]]이 [[신권 정치]]로 통치하고 있던 [[제네바]]가 녹스의 여군주 폭군론의 출간을 허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교를 단절하고 칼뱅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잉글랜드의 [[성공회]]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는 일단 같은 개신교로서 가톨릭교도들에게 대항하여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논리로 전략적으로 협조했으나, 종교적 순수성보다 실리적인 왕실의 권위 확립이 더 큰 우선순위였던 성공회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는 왕도 멋대로 갈아 치우고, 가치관도 반세속주의적이고, 왕권과 세속 정부에 대한 교권의 우월함을 주장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매파들을 상당히 고깝게 보았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장로교회와 영국식 칼뱅주의의 아버지인 존 녹스는 심각한 여성 혐오자였고, 장로교 신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 수준으로 끌어올린 조지 뷰캐넌은 알코올 중독 폭력 교사였다. 녹스와 뷰캐넌의 학풍을 이어받아 언약도 혁명까지 1~2세대 장로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던 앤드류 멜빌도 광신적인 반세속정부주의자였다. 거기다 2세대 교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아치볼드 존스턴, 알렉산더 핸더슨같은 언약도 혁명의 지도자들은 신의 왕국을 현세에 구현하겠답시고, 자식은 많이 낳아놓고 양육은 한 번도 책임지지 않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가장들이였다. 심지어 존스턴과 핸더슨은 자신들이 에딘버러 성에서 혁명 정부를 이끌 동안, 버림받은 처자식들은 빚쟁이들에게 구걸하게 만들었던 막장 인성의 소유자들이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평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 기준으론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일 뿐만 아니라 칼뱅주의 특유의 도덕관념 때문에 상술한 16세기 후반-17세기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은 일기나 자서전도 많이 썼고, 내용도 신 앞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이라도 지키는 양 성생활이나 가정 생활 같은 상당히 은밀한 개인적 내용들도 많이 적어 놓았기 때문에 깔 거리 발굴도 쉬운 편이다. 예로 들면 언약도 혁명 선언문의 저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치볼드 존스턴만 하더라도 자기 일기에서 20살 때 14살짜리 곰보 자국이 흉했던 여아와 결혼하여, 처음엔 곰보 흉터를 흉해 했으나 기도할 때 흘리는 눈물이 너무 아름다워 거기 반해 결혼 생활 내내 기도와 섹스만 반복 하다가(...) 겨우 1년 뒤 자기 생각엔 섹스를 너무 많이 해(...) 어린 처를 병 걸려 죽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성욕을 주체 못 해 겨우 1년 뒤 중매로 다시 결혼했다는 내용을 대놓고 써 놓았으니(...) 현대인들은 메리 여왕에 대한 비판의 주 출처인 스코틀랜드 칼뱅파 장로교 종교개혁가들이 좀체 긍정적으로 보일 리가 없고 그 반대급부로 메리 여왕은 오히려 더욱 긍정적으로, 낭만적으로 부각된 것이다. 정치역사적 관점에서도 현대 [[스코틀랜드 국민당]]을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가 다시 부흥하고 있긴 하지만, '''막상 유럽 전역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알파버전이라 할만한 16-17세기의 민족 관념 형성을 주도한 로우랜드 개신교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정치계파상으로 보면 대부분 17세기 후반, 18세기에 친영 통합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주로 반잉글랜드 감정을 자양분으로 삼는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와 달리, 이 당시 16-17세기 로우랜드 스코틀랜드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은 '''잉글랜드가 아니라 자국 내 하이랜드, 서부 제도 가톨릭 게일어권 클랜들을 가장 큰 주적으로 보고 적대했다.''' 이들을 근현대적 관점에서 '친잉글랜드 매국노'로 비하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문화적 성향도 외부적으로 더 잘 알려지고 더 확실하고 독특하게 나머지 잉글랜드와 차별화되는 게일어 하이랜드 문화를 강조하는 성향이 더 강하고, 무엇보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이념은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에 20세기 중후반의 반제국주의적 제3세계 민족주의 담론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로우랜드 언약파 스코틀랜드 지도부의 방침은 이제 같은 개신교 믿게 됐으니 스코틀랜드를 단순히 잉글랜드에게 여 드십쇼 하면서 바치는게 아니라, '''오히려 잉글랜드의 개신교는 짭개신교 국교회니깐 진짜 칼뱅주의적 종교개혁을 겪은 스코틀랜드가 주도하는''' 형태의 영국 통합을 추구했고, 훗날 1707년 양국 통합 때도 독립된 사법권을 강하게 주장하며 결국 관철해냈듯이 스코틀랜드 민족의식이 없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근세적인 관점에서 국가 자체는 잉글랜드와 공유해도 여전히 그 안에서 독립적인 스코틀랜드적 정체성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연히 이런 섬세한 역사적 평가는 대중 담론의 차원에선 순식간에 지워지고 무시되기 일쑤이다.] 따라서 이 시기 로우랜드 개신교 지식인들의 핵심적인 사상적 요소였던 칼뱅주의 자체가 범세계적으론 주로 영미 경제문화적 엘리트 기득권과 관련된 인상이 강한지라 막상 역사적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발흥은 언약파 칼뱅주의 민족주의자들을 떼어놓고는 결코 이해할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종교성을 언급하는거 자체를 꺼리는 성향이 강하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현대 스코틀랜드 독립, 민족주의 세력의 역사 인식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메리와 반대한 로우랜드 스코틀랜드 엘리트들은 현대 사회정치적 문맥에 따른 재평가나 재발굴도 하나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